50년대는 전시와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였고 체계적인 공작원 선발 및 교육이 어려운 시기였으며 북한의 지리와 말에 능숙한 월남자중 반공사상이 투철한 사람들을 애국심담보와 경제적조건등을 제시하여 공작원들을 선발하였으며 60년대 들어서면서 부터는 물색관이 경제적 조건의 보장과 안정적인 직업(생활보장)등을 내세워 체계적으로 공작원을 포섭하게 되었고 가정 및 사회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을 포섭, 선별 채용하게 되었다.
군 입대전의 포섭대상자에게는 병역의 면제를 보장하는 조건도 있었다 하지만 공작원 생활을 마치고 사회생활 중 다시 군에 입대하여 병역을 필해야하는 경우가 70년대까지도 이어졌고 또한 군 병역을 필하고 사회생활을 하던 중 물색관으로 부터 직업알선 및 생활안정 등의 제시를 받아 공작원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90년대까지 물색관이 제시하는 조건에는 시대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50년대는 주로 3~5명이 침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6~70년대 들어서면서는 단독침투를 하였으며 임무에 따라 2~3명이 침투하는 경우도 있었다.
50년 전시에는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침투를 하였으며 휴전이후에는 해상 및 육상으로 침투 하였고 우회 공작원이라 하여 제 삼국을 통하여 침투를 하기도 하였다.
대북침투 및 공작활동에 필요한 교육은 6~70년대 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하였으나 전사자는 줄어들지는 않았다.
이후 1972년 7. 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으나, 북한과 한국의 상호 첩보활동은 비밀리에 행하여졌으며 1972년 이후의 공작활동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대북임무를 한 사실이 있음을 입증시켜주는 내용이 있으며 이는 민간공작원에 의한 단독임무수행자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전국 각지에서 훈련을 실시하였다.
현행 전사자 명단을 볼 때, 국가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의 전사자명단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1950년대부터 구성요원을 보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1990년대 까지 이러한 체계로 이루어졌으며 특별한 경우도 있었다.
안가라는 특정지역에 고립되어 1960~1970년대는 학생(또는 훈련생)이 최고 8명 내외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지기도 하였다.
1972년 남북공동성명이후는 뚜렷한 구성원을 구성하였고 이러한 구성원은 1990년대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안가에서 죽음의 명령을 기다리던 공작원들은 전. 평시를 가릴 수 없었으며 평시에 더욱 많은 희생자를 낳았기에 8천여명이 넘는 민간신분의 북파공작원이 이름 없는 별로 사라져갔다.
이들은 유품이나 유골도 없이 50년 넘게 방치되다가 2005. 1. 11일 69위, 2006년 3. 8일 42위가 대전국립현충원에 이름 석 자만이 새겨져 있다.

  민간 북파공작원 단독 팀의 인원구성
    1. 팀장(속칭:큰선생) : 장교
    2. 부팀장(속칭:작은선생) : 하사관
    3. 보조원(속칭:키파) : 사병
    4. 보조원(속칭:밥쟁이) : 사병
    5. 학생(공작원) : 민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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